[월간미술] 포스코 미술관 _ 김덕기 展 / 김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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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tudio 작성일16-06-20 00:37 조회1,53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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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기 展
6.11~7.12 포스코 미술관
마른 붓으로 가로 세로를 누빈 삼베무늬 바탕의 묵직한 힘, 이것은 김덕기표 그림의 확실한 트레이드 마크다. 그가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갈필로 화면 전체를 메운격자무늬 배경처리는 그의 다양한 먹선을 도드라지게 만든 매력적인 요소였다. 빈 곳을 그냥 두지 않는 그의 그림은 일종의 파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백의 미에 상반되는 파격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한구석을 커다랗게 비워 둘 줄 안다는 점에서 그는 잘 교육받은 먹그림쟁이가 확실했다. 흰 것은 그림이요, 검은 것은 그림인 동양화·한국화·수묵화의 정형성을 벗어난 그의 화면은 이른바 ‘한국화의 위기상황’을 헤쳐 나가는 데 청신호로 보이기도 했다.
김덕기의 장점은 차분하게 튄다는 점이다. 갈필의 삼베무늬 바탕이 성에 차지 않으면 배경을 온통 검게 칠해버리기도 하는 독특한 미감을 가진 그이다. 그가 몇 년간 지속해 온 채색·격자무늬·컬러드로잉·마무리에 이르는 작업과정은 이제 삼
베무늬 바탕을 넘어서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의 고유한 또는 획일적인 방법을 넘어서서, 적어도 네 가지 이상의 방법을 선보인 것이다.
우선 화사한 배경 채색 위에 모필이나 콘테, 파스텔 등으로 선묘를 넣은 그림들이 그것이다. 또 하나, 파스텔이나 목탄, 콘테를 쓴 라인 드로잉들도 그의 경쾌함을 배가시켜 주었다. 게다가, 한 번의 붓질로 여러 색을 겹쳐 내는 혁필법을 빌려쓰고 있기도 한데, 실제 혁필을 쓴 것이 아니라 모필에 여러 색을 묻혀 뉘어 쓴 측필로, 맑고 밝은 김덕기를 업그레이드했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 제목으로 채택된 〈세 그루의 나무〉에서 보이는, 옅은 채색 위에 연묵과 담채로 풍경을 그린 몽롱한 수묵담채화도 눈에 띈다.
이 다음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겠으나, 김덕기가 선택한 방법들이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은, 화가의 미덕 가운데 하나인 작업량이라는 잣대로 보아,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이다. 곡해하면 의지의 과잉으로까지 비칠 법한 그의 창작의지는 이렇듯 매재 실험에 의한 매력적인 성과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해 보인다. 여기에 욕심을 하나 보태고 싶어 그와 짧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들이 가끔 지적하는 장욱진, 이철수, 샤갈 운운하는 운필이나 화면구성의 유사성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야깃거리의 정체’가 아닌가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따뜻한 가족과 아내와 아이와 이웃과 동네 등의 소재들을 통해서, 가족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인간의 삶 일반에 관한 소통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이야깃거리를 점점 넓혀 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왜 나는 그의 얘깃 거리에 시비를 걸고 싶은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시샘이었다. 그의 이야기들이 너무 눈부시게 밝고 명랑한 행복이기 때문이었다. 행복을 보여주는 화가라고 했다. 약간 억측을 부리자면, 그의 행복한 밝음이 불안해 보였다. 심지어 그의 그림에서 밝음 밑에 숨어 있는 지난날의 어둠을 읽어 낼 도리가 없음을 안타까워하기까지 했다. 김덕기에게 미술이 ‘美術’로 그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우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미 꼼꼼한 삼베무늬 여백처리로 노작의 힘을 보여 주었으며, 이제는 붓질 몇 번으로 화면 전체를 몽롱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가 아닌가. 자신의 체험을 화면에 담는 ‘경험자로서의 예술가’의 지위에 충실한 지금의 모습을 지켜보며, 불과 4년 전 갓 서른의 그가 ‘시간과 세월과 인생과 나이’를 이야기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도 이러한 김덕기의 매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준기·가나아트갤러리 공공미술팀장
월간미술.htm
No.: 71, Read: 36, Vote: 0, 2005/01/12 16:45:00
6.11~7.12 포스코 미술관
마른 붓으로 가로 세로를 누빈 삼베무늬 바탕의 묵직한 힘, 이것은 김덕기표 그림의 확실한 트레이드 마크다. 그가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갈필로 화면 전체를 메운격자무늬 배경처리는 그의 다양한 먹선을 도드라지게 만든 매력적인 요소였다. 빈 곳을 그냥 두지 않는 그의 그림은 일종의 파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백의 미에 상반되는 파격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한구석을 커다랗게 비워 둘 줄 안다는 점에서 그는 잘 교육받은 먹그림쟁이가 확실했다. 흰 것은 그림이요, 검은 것은 그림인 동양화·한국화·수묵화의 정형성을 벗어난 그의 화면은 이른바 ‘한국화의 위기상황’을 헤쳐 나가는 데 청신호로 보이기도 했다.
김덕기의 장점은 차분하게 튄다는 점이다. 갈필의 삼베무늬 바탕이 성에 차지 않으면 배경을 온통 검게 칠해버리기도 하는 독특한 미감을 가진 그이다. 그가 몇 년간 지속해 온 채색·격자무늬·컬러드로잉·마무리에 이르는 작업과정은 이제 삼
베무늬 바탕을 넘어서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의 고유한 또는 획일적인 방법을 넘어서서, 적어도 네 가지 이상의 방법을 선보인 것이다.
우선 화사한 배경 채색 위에 모필이나 콘테, 파스텔 등으로 선묘를 넣은 그림들이 그것이다. 또 하나, 파스텔이나 목탄, 콘테를 쓴 라인 드로잉들도 그의 경쾌함을 배가시켜 주었다. 게다가, 한 번의 붓질로 여러 색을 겹쳐 내는 혁필법을 빌려쓰고 있기도 한데, 실제 혁필을 쓴 것이 아니라 모필에 여러 색을 묻혀 뉘어 쓴 측필로, 맑고 밝은 김덕기를 업그레이드했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 제목으로 채택된 〈세 그루의 나무〉에서 보이는, 옅은 채색 위에 연묵과 담채로 풍경을 그린 몽롱한 수묵담채화도 눈에 띈다.
이 다음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겠으나, 김덕기가 선택한 방법들이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은, 화가의 미덕 가운데 하나인 작업량이라는 잣대로 보아,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이다. 곡해하면 의지의 과잉으로까지 비칠 법한 그의 창작의지는 이렇듯 매재 실험에 의한 매력적인 성과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해 보인다. 여기에 욕심을 하나 보태고 싶어 그와 짧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들이 가끔 지적하는 장욱진, 이철수, 샤갈 운운하는 운필이나 화면구성의 유사성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야깃거리의 정체’가 아닌가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따뜻한 가족과 아내와 아이와 이웃과 동네 등의 소재들을 통해서, 가족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인간의 삶 일반에 관한 소통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이야깃거리를 점점 넓혀 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왜 나는 그의 얘깃 거리에 시비를 걸고 싶은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시샘이었다. 그의 이야기들이 너무 눈부시게 밝고 명랑한 행복이기 때문이었다. 행복을 보여주는 화가라고 했다. 약간 억측을 부리자면, 그의 행복한 밝음이 불안해 보였다. 심지어 그의 그림에서 밝음 밑에 숨어 있는 지난날의 어둠을 읽어 낼 도리가 없음을 안타까워하기까지 했다. 김덕기에게 미술이 ‘美術’로 그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우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미 꼼꼼한 삼베무늬 여백처리로 노작의 힘을 보여 주었으며, 이제는 붓질 몇 번으로 화면 전체를 몽롱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가 아닌가. 자신의 체험을 화면에 담는 ‘경험자로서의 예술가’의 지위에 충실한 지금의 모습을 지켜보며, 불과 4년 전 갓 서른의 그가 ‘시간과 세월과 인생과 나이’를 이야기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도 이러한 김덕기의 매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준기·가나아트갤러리 공공미술팀장
월간미술.htm
No.: 71, Read: 36, Vote: 0, 2005/01/12 16: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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