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미주의자가 전하는 행복 메시지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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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tudio 작성일18-08-11 00:53 조회76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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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즐거운 여행, 2016, Acrylic on Canvas, 53X72.7cm
2016. 9. 21(Wed) - 9. 30(Fri)
GALLERY RHO
탐미주의자가 전하는 행복 메시지
이준희 《월간미술》 편집장
그림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그것을 그린 사람인가 보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걸 소유한 사람인가? 이 문제는 모든 예술작품이 지닌 숙명이다. 창작활동의 시작과 끝, 즉 생산부터 유통을 거쳐 최종 컬렉션에까지 이르는 작품의 운명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림을 보고 느끼는 해법은 제각기 다르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 그려진 그림은 이미 그 자체가 독립된 세계, 나아가 작은 우주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창조자인 화가와 수용자인 관객 사이에 놓인 그림은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다. 미완성의 단계다. 마찬가지로 화가의 손을 떠난 그림은 더 이상 화가의 것이 아니다. 보는 사람의 해석과 감상을 통해서 완전한 생명체로 거듭난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자 앞에서 비로소 그림은 새로운 의미를 지닌 존재로 거듭난다. 김덕기의 그림도 예외는 아니다. 화려한 색채와 구체적 형상으로 구축된 그의 그림은 관객 앞에서 최종 완성된다. 이런 맥락에서 강조하고 싶은 말은 김덕기의 그림은 반드시 원작을 직접 봐야한다는 것이다. 인쇄되어 도록에 실린 이미지나 각종 아트상품 오브제에 사용된 이미지만으론 김덕기의 그림을 제대로 감상했다고 할 수 없다. 하물며 디지털 모니터 화면으로 김덕기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반쪽짜리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김덕기의 그림은 단순하게 형상과 색채만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선명한 색채 못지않게 풍부하고 두터운 물감의 질감을 함께 느껴야 한다. 실제 작품 앞에 서서 가깝고 멀게 오가며 봐야한다. 마치 망원경으로 먼 곳을 바라보듯 관조觀照해야하고, 때론 현미경으로 미세한 것을 살피듯 관찰觀察하는 자세로 천천히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예술성과 대중성의 균형
김덕기의 그리기 방식과 결과물인 작품은 ‘농부’와 ‘곡식’에 비유할 수 있다. 화가 김덕기는 농부고 그의 그림은 곡식인 셈이다. 땅 위에 씨앗을 뿌리고 정성껏 가꾸는 농부처럼 김덕기는 캔버스 위에서 농사를 짓는다. 화면 위에 펼쳐진 물감과 붓질의 흔적은 화가이자 농부인 김덕기의 땀방울을 연상시킨다. 엄청난 노동력을 수반하는 작업방식을 보면 수확의 보람을 느끼는 농부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김덕기는 농부처럼 성실한 화가다. 그림 속으로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근면함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보여준 엄청난 작업량도 이런 성실함을 대변해준다. 김덕기는 1998년 첫 개인전이후 (2009년만 빼놓고) 한해도 거르지 않고 지금까지 꾸준히 개인전을 열어 왔다. 남들에게 안정적인 직장이라 여겨지는 고등학교 미술교사를 그만 둔지 올해로 벌써 10년. 그는 교사직을 버리고 고향 여주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지금까지 줄기차게 오직 작업에만 몰두해왔다. 치열하고 프로페셔널 한 직업으로서 화가의 길을 걷겠노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이런 결정은 모험이자 도전이었다. 결과는 성공적. 그의 그림은 예술성과 대중성, 독자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획득했다.
현대적 감각의 관념산수화
노화랑에서 3년 만에 열리는 이번 개인전은 김덕기 회화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전시에 출품된 근작은 고유하고 차별화된 그 만의 스타일을 확고히 보여준다. 일관된 주제와 소재는 화려한 원색물감 조합으로 밝고 경쾌하게 표현된다. 200호 크기 <가족 - 함께하는 시간> 연작이 대표적 예다. 네 점으로 이뤄진 이 시리즈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상징한다. 각 계절별로 컬러가 구분된 연작엔 김덕기 그림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만한 요소가 골고루 담겨있다. 행복한 가족의 모습과 그들을 둘러싼 자연, 그리고 일상의 소품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가족-인물은 주인공이고, 집/강아지/나무/꽃/자동차/자전거/분수…는 조연 역할을 한다.
한편 김덕기의 그림을 보고 읽는 시선의 방향은 가로보다 세로가 더 적절하다. 화면 아랫부분이 근경近境이고 윗부분이 원경遠境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까워 보이는 아랫부분엔 주로 두터운 붓질로 그려진 각양각색 꽃이 묘사된다. 반면 멀리보이는 윗부분은 평면적이고 패턴화 된 나무형상이 등장한다. 이때 나무 표현은 단색 위에 무수히 많은 점이 찍히면서 명암을 나타내기도 한다. 화면 가운데 부분엔 그림의 주제라 할 수 있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배치된다. 그림의 내용은 현실세계에서 볼 수 있는 실제 풍경처럼 보이지만 때론 아닐 때도 있다. 마치 샤갈의 그림처럼 초현실적인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도 있다. 인물과 자연 서로 엉키고 뒤섞이면서 현실세계와 허구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 김덕기의 그림이 일반적인 풍경화와 사뭇 달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풍경-그림은 동화적 상상력으로 구현된 관념의 세계다. 소실점도 없고 원근법도 무시된다. 평면적이고 시선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그림을 ‘현대적 관념 산수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의 깊이와 밀도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김덕기는 무엇보다 그림의 격조格調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금은 비록 지필묵을 버리고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을 주로 사용하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화)의 정신성을 고민한다. 이와 같은 의지는 끝없이 모색되고 있는 형식실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평론가 박영택은 김덕기의 그리기 방식을 동양화의 미점米點으로 분석하면서 변관식의 산수화에서 유사점을 찾기도 했다. “이 점들은 화면을 전체적으로 평면성을 강조해주면서 사실적인 풍경이면서도 가상적이고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물감과 붓질로 구성된 조형체계임을 설득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미점과도 같은 점들은 그림을 온통 순수한 색채 그 자체로 인식 시킨다”는 박영택의 지적대로 김덕기의 점묘點描는 형상과 색채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김덕기는 여러 가지 색깔의 물감을 섞어서 혼합된 색을 만들지 않고 튜브에서 바로 짜낸 원색을 그대로 사용해 바탕색을 칠한다. 그리고 그 위에 역시 여러 색을 섞지 않고 원색 물감을 그대로 점으로 찍어서 형상을 표현한다. 점의 크기와 질감을 달리하며 드라마틱하고 풍성한 색채의 향연을 펼친다. 김덕기는 그림의 깊이가 모필毛筆의 필력筆力에서 나왔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자신이 마치 그림 속으로 직접 들어갔다 나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처럼 작가 특유의 스타일로 자리매김 한 점묘는 후기인상주의 작가 조르주 쇠라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섬세하고 치밀한 레이어layer가 반복적으로 겹치는 공필화법工筆畫法과 유사하다. 무수히 많은 점을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찍는 행위는 공필화 못지않은 정성이 들어간다. 이런 과정을 거친 작품이라서 보는 이에게까지 깊이와 밀도가 전달된다.
작업실을 방문해서 직접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림의 밑바탕은 오방색五方色에서 출발함을 알 수 있었다. 점이 찍히기 이전 캔버스 바탕 색면은 마크 로스코의 추상회화를 연상시켰다. 구체적 형상이 그려지기 전 단계에 단순한 색면이었지만 그 자체로도 완성도 높은 비구상회화 같았다. 이렇듯 김덕기의 그림은 색면추상에서 출발해 점차 구상회화로 전이되는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내용과 형식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표현기법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나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진정한 작품의 완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여기까지가 작가의 역할이다. 나머지는 그의 그림을 보고 즐기는 관객이 채워야한다. 결국 ‘좋은 그림’이란 작가와 관객이 함께 만들고 함께 나누는 그림을 말한다. 화려한 색채와 친근한 이미지로 전하는 김덕기의 행복 메시지를 즐겁게 수신受信하는 것 역시 관객의 몫이다.
2016. 9. 21(Wed) - 9. 30(Fri)
GALLERY RHO
탐미주의자가 전하는 행복 메시지
이준희 《월간미술》 편집장
그림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그것을 그린 사람인가 보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걸 소유한 사람인가? 이 문제는 모든 예술작품이 지닌 숙명이다. 창작활동의 시작과 끝, 즉 생산부터 유통을 거쳐 최종 컬렉션에까지 이르는 작품의 운명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림을 보고 느끼는 해법은 제각기 다르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 그려진 그림은 이미 그 자체가 독립된 세계, 나아가 작은 우주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창조자인 화가와 수용자인 관객 사이에 놓인 그림은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다. 미완성의 단계다. 마찬가지로 화가의 손을 떠난 그림은 더 이상 화가의 것이 아니다. 보는 사람의 해석과 감상을 통해서 완전한 생명체로 거듭난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자 앞에서 비로소 그림은 새로운 의미를 지닌 존재로 거듭난다. 김덕기의 그림도 예외는 아니다. 화려한 색채와 구체적 형상으로 구축된 그의 그림은 관객 앞에서 최종 완성된다. 이런 맥락에서 강조하고 싶은 말은 김덕기의 그림은 반드시 원작을 직접 봐야한다는 것이다. 인쇄되어 도록에 실린 이미지나 각종 아트상품 오브제에 사용된 이미지만으론 김덕기의 그림을 제대로 감상했다고 할 수 없다. 하물며 디지털 모니터 화면으로 김덕기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반쪽짜리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김덕기의 그림은 단순하게 형상과 색채만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선명한 색채 못지않게 풍부하고 두터운 물감의 질감을 함께 느껴야 한다. 실제 작품 앞에 서서 가깝고 멀게 오가며 봐야한다. 마치 망원경으로 먼 곳을 바라보듯 관조觀照해야하고, 때론 현미경으로 미세한 것을 살피듯 관찰觀察하는 자세로 천천히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예술성과 대중성의 균형
김덕기의 그리기 방식과 결과물인 작품은 ‘농부’와 ‘곡식’에 비유할 수 있다. 화가 김덕기는 농부고 그의 그림은 곡식인 셈이다. 땅 위에 씨앗을 뿌리고 정성껏 가꾸는 농부처럼 김덕기는 캔버스 위에서 농사를 짓는다. 화면 위에 펼쳐진 물감과 붓질의 흔적은 화가이자 농부인 김덕기의 땀방울을 연상시킨다. 엄청난 노동력을 수반하는 작업방식을 보면 수확의 보람을 느끼는 농부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김덕기는 농부처럼 성실한 화가다. 그림 속으로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근면함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보여준 엄청난 작업량도 이런 성실함을 대변해준다. 김덕기는 1998년 첫 개인전이후 (2009년만 빼놓고) 한해도 거르지 않고 지금까지 꾸준히 개인전을 열어 왔다. 남들에게 안정적인 직장이라 여겨지는 고등학교 미술교사를 그만 둔지 올해로 벌써 10년. 그는 교사직을 버리고 고향 여주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지금까지 줄기차게 오직 작업에만 몰두해왔다. 치열하고 프로페셔널 한 직업으로서 화가의 길을 걷겠노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이런 결정은 모험이자 도전이었다. 결과는 성공적. 그의 그림은 예술성과 대중성, 독자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획득했다.
현대적 감각의 관념산수화
노화랑에서 3년 만에 열리는 이번 개인전은 김덕기 회화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전시에 출품된 근작은 고유하고 차별화된 그 만의 스타일을 확고히 보여준다. 일관된 주제와 소재는 화려한 원색물감 조합으로 밝고 경쾌하게 표현된다. 200호 크기 <가족 - 함께하는 시간> 연작이 대표적 예다. 네 점으로 이뤄진 이 시리즈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상징한다. 각 계절별로 컬러가 구분된 연작엔 김덕기 그림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만한 요소가 골고루 담겨있다. 행복한 가족의 모습과 그들을 둘러싼 자연, 그리고 일상의 소품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가족-인물은 주인공이고, 집/강아지/나무/꽃/자동차/자전거/분수…는 조연 역할을 한다.
한편 김덕기의 그림을 보고 읽는 시선의 방향은 가로보다 세로가 더 적절하다. 화면 아랫부분이 근경近境이고 윗부분이 원경遠境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까워 보이는 아랫부분엔 주로 두터운 붓질로 그려진 각양각색 꽃이 묘사된다. 반면 멀리보이는 윗부분은 평면적이고 패턴화 된 나무형상이 등장한다. 이때 나무 표현은 단색 위에 무수히 많은 점이 찍히면서 명암을 나타내기도 한다. 화면 가운데 부분엔 그림의 주제라 할 수 있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배치된다. 그림의 내용은 현실세계에서 볼 수 있는 실제 풍경처럼 보이지만 때론 아닐 때도 있다. 마치 샤갈의 그림처럼 초현실적인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도 있다. 인물과 자연 서로 엉키고 뒤섞이면서 현실세계와 허구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 김덕기의 그림이 일반적인 풍경화와 사뭇 달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풍경-그림은 동화적 상상력으로 구현된 관념의 세계다. 소실점도 없고 원근법도 무시된다. 평면적이고 시선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그림을 ‘현대적 관념 산수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의 깊이와 밀도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김덕기는 무엇보다 그림의 격조格調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금은 비록 지필묵을 버리고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을 주로 사용하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화)의 정신성을 고민한다. 이와 같은 의지는 끝없이 모색되고 있는 형식실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평론가 박영택은 김덕기의 그리기 방식을 동양화의 미점米點으로 분석하면서 변관식의 산수화에서 유사점을 찾기도 했다. “이 점들은 화면을 전체적으로 평면성을 강조해주면서 사실적인 풍경이면서도 가상적이고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물감과 붓질로 구성된 조형체계임을 설득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미점과도 같은 점들은 그림을 온통 순수한 색채 그 자체로 인식 시킨다”는 박영택의 지적대로 김덕기의 점묘點描는 형상과 색채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김덕기는 여러 가지 색깔의 물감을 섞어서 혼합된 색을 만들지 않고 튜브에서 바로 짜낸 원색을 그대로 사용해 바탕색을 칠한다. 그리고 그 위에 역시 여러 색을 섞지 않고 원색 물감을 그대로 점으로 찍어서 형상을 표현한다. 점의 크기와 질감을 달리하며 드라마틱하고 풍성한 색채의 향연을 펼친다. 김덕기는 그림의 깊이가 모필毛筆의 필력筆力에서 나왔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자신이 마치 그림 속으로 직접 들어갔다 나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처럼 작가 특유의 스타일로 자리매김 한 점묘는 후기인상주의 작가 조르주 쇠라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섬세하고 치밀한 레이어layer가 반복적으로 겹치는 공필화법工筆畫法과 유사하다. 무수히 많은 점을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찍는 행위는 공필화 못지않은 정성이 들어간다. 이런 과정을 거친 작품이라서 보는 이에게까지 깊이와 밀도가 전달된다.
작업실을 방문해서 직접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림의 밑바탕은 오방색五方色에서 출발함을 알 수 있었다. 점이 찍히기 이전 캔버스 바탕 색면은 마크 로스코의 추상회화를 연상시켰다. 구체적 형상이 그려지기 전 단계에 단순한 색면이었지만 그 자체로도 완성도 높은 비구상회화 같았다. 이렇듯 김덕기의 그림은 색면추상에서 출발해 점차 구상회화로 전이되는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내용과 형식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표현기법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나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진정한 작품의 완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여기까지가 작가의 역할이다. 나머지는 그의 그림을 보고 즐기는 관객이 채워야한다. 결국 ‘좋은 그림’이란 작가와 관객이 함께 만들고 함께 나누는 그림을 말한다. 화려한 색채와 친근한 이미지로 전하는 김덕기의 행복 메시지를 즐겁게 수신受信하는 것 역시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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